2. 작업자의 ‘우정’을 찾아서

구구


<작업자의 사전>(유유히, 2024) 출간 후 2개월, 작업자 구구와 서해인이 책을 쓰고, 팔고, 책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다양한 부가 작업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편지의 형식으로 주고 받습니다. 2024년 8월부터 ‘작업자의 홈페이지’에서 비정기적으로 연재 됩니다.


해인 님, 안녕하세요. 구구 입니다.

엄주 작가와 함께 하는 합동 북토크가 한 달 전 마무리 되었지요. 저는 그날 북토크를 마치면서 한 시절이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열정을 담아, 그리고 저로서는 첫 책 작가로서의 설렘과 들뜸을 담아 『작업자의 사전』에 대해 공적으로 발화하는 시절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했죠.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그 다음’은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작업자의 사전』을 통해 어디로 향해 가고 싶었는지 다시 생각해볼 시점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다음 스텝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남들에게 보여지기로 예정되어 있는 ‘편지’라는 형식이 갖는 난감함에 대해 고백하고 싶습니다. 해인 님의 편지를 받고 처음 든 생각은, 해인 님이 편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호명하고 있는 수신인은 제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메일로 치자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숨은 참조에 걸어두고 수신인에 명목상 저를 적어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편지를 통해 느낀 당혹감은 저만의 감정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편지'라는 특수한 형식에 대해 『편지의 단상』*의 저자 헬렌 크라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 편지 쓰는 이에게 '당신'은 집에 있지 않다. 당신이라는 단어는 호명을 위한 기호로만 작동한다.

1. 너, 그대, 당신. 편지 쓰는 이는 2인칭을 사용하지만 정작 편지에는 1인칭 '나'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수신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 사람', 즉 당신이 수신인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편지에 적힌다. 편지는 영원한 독백이다." (『밤이 아닌데도 밤이 되는』, p.39)


제가 느낀 난감함은 해인 님이 편지에 써 주신 '우리의 독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과도 연결해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가 『작업자의 사전』의 독자를 상정했듯, 서로 주고 받는 편지의 독자 역시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편지라는 장소를 경유할 뿐"이라면, 이 글은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요? 헬렌 크라우스의 말처럼 "누구에게로 수신되어도 상관없는"게 편지의 속성이라면, 우리는 왜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나누고 이를 공개해야만 했던 걸까요? 그냥 우리 둘 사이의 대화로 마무리 지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이에 대해서는 다시 헬렌 크라우스의 말을 빌려오고 싶습니다. 그는 『편지의 단상』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차 TIME DEVIATION. 편지의 본질은 시차다. 대면하지 않기에 상상의 여지와 오해의 여지가 동시에 발생하는 일탈적 매체. 편지는 결코 개별적 주체 간의 대화가 아니며, 리얼리티가 아닌 해석의 산물이다." (『밤이 아닌데도 밤이 되는』, p.30)

편지가 대화도, 리얼리티도 아닌 해석의 산물이라면 저는 오늘 이 편지를 통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던 긴장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 이 긴장이 만들어낸 『작업자의 사전』이라는 결과물에 대해 '해석'해보고 싶어요. 다른 동료, 독자, 출판계 등을 떠나 오직 우리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참입니다. 저만의 상상과 오해를 가미해서요. 이것은 편지의 수신인을 오직 해인 님으로 정해놓고 쓰겠다는 결심입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저는 여전히 지독하게 저만 아는 저자네요. 해인 님께서는 인쇄소 기장님에게 까지 감사인사를 전하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부끄럽지만 계속 이어가보겠습니다.

얼마 전, 안담 작가의 『친구의 표정』 북토크에 다녀왔습니다. 그날 북토크는 안담 작가의 친구인 이슬아 작가가 진행을 맡았습니다. 이슬아 작가는 "안담과 먼 말들"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 갔습니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나눠 온 우정을 기반으로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눴어요. 누군가에게서 ‘먼 말'을 고를 수 있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기 제가 가장 자주 만나던 사람은 해인 님이었습니다. 저는 이슬아, 안담 작가의 대화를 들으며 "서해인과 먼 말들"을 적어 보았어요. 한참 고민한 끝에 외로움, 지루함, 분노 같은 단어들을 어렵사리 적었습니다. 적고 나니 알겠더군요. 나는 해인 님에 대해 아직도 모른다는 것을요.

「최후의 독자」에서 안담 작가는 친구 이끼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이끼와 나는 언젠가 각자의 잘못이 밝혀져서 공론화를 당하게 되면 서로의 증인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

"걔는 그러고도 남을 애예요, 거기서 출발합시다."
"증언으로서는 아주 불리하네요."
"그렇죠. 내 진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중요해요."
"모든 걸 잃더라도요.”"  (『친구의 표정』, p.268)


저는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만약 해인 님의 잘못이 밝혀져서 공론화를 당하게 되면 나는 ‘해인 님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러려면 제가 해인 님의 진실을 알아주는 사람이어야하는데, 왠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작업자의 사전』에 실린 에세이를 쓸 때 저는 조금 두려웠습니다. 숱한 아르바이트 경험을 꺼내어 놓는 일은 곧 저의 가난을 드러내는 일과 같았고, 취업이 되지 않아 방황하던 시기의 이야기는 곧 저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거든요. 제가 그 글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건 장담컨대 공동 저자인 해인 님의 존재가 컸습니다. 제 글의 첫 독자로,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 놓아도 두려울 것 없는 상대로 해인 님은 알맞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 글이 우리 관계의 역학을 흔드는 사건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각자의 계급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갈급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대화를 나누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지요. 제가 생각하는 우정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후련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 못난 나를 내보여도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직시해주는 것.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만의 진실을 알아주는 것. 그리고 해인 님은 제가 예상했던 대로 저를 똑바로 봐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상하지 못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나눠 온 ‘일’ 이야기 외에 각자의 진심을 꺼내보일 수 있는 대화를 더는 나누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를 연결해주는 건 오직 ‘일’ 뿐이었습니다.

『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문학적 우정을 찾아서』를 쓴 작가 장영은은 ‘사람을 살리는 우정’을 나누는데 말과 글이 중요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분명 글을 쓰며 어떤 종류의 우정을 나눴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저를 살리는 일이었을까 생각해본다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해인 님과 작업하며 때로 무척 외로웠거든요.

저는 작업 내내 우리를 가로막던 긴장을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사수처럼, 때로는 편집자처럼 작업 상황을 체크해주는 해인님은 제게 엄격하고 든든한 동료였지만 친구로서 곁을 내어주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해인님과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제게는 이 질문이 책을 쓰는 일 만큼이나 중요한 숙제로 남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해온 고민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얼마 전 카톡으로 n번째 다투던 중 해인 님께서 말씀하셨죠. “구구님은 제가 좋아하는 작업자 동료…” 라고요. 저는 이 말에서 두 가지 가설을 세워 보았습니다. 나와 달리 해인 님에게 동료와 친구는 동떨어진 단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가설, 아니면 해인 님에게는 ‘우정’이라는 더께가 ‘친구’라는 단어에만 지는 것은 아니라는 가설. 두 번째 가설은 말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해인 님이 우정을 나누는 대상은 친구뿐 아니라 아이돌, 책을 망라하는 모든 콘텐츠가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죠.

앞선 편지에서 『작업자의 사전』이 ‘노동의 계보집’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저 역시 해인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일을 이해하고 대화를 꾸준히 이어가려면 노동의 계보 이전에 우정의 계보를 이어갈 방법을 고민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작업자의 사전』이라는 성공적인 결과물을 함께 만든 동료지만, 우정이라는 결과물을 만드는 데에는 거듭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 이야기 없이는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고, 만남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작업자로서 시도한 계보-잇기는 우정의 부재로 인해 서로에게 책임만 남긴 채 갈피를 잃은 상황입니다. 저는 우정 없이 『작업자의 사전』의 다음을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할거란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우리의 진실을 멋대로 오해하고 상상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제 해인 님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작업자의 ‘그 다음’을 도모하는 일에 우정을 배치시키는 일의 의미에 대해서요. 작업자가 작업 바깥에서 만나는 일이야말로 ‘그 다음’을 상상하는데 필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제 멋대로의 생각에 대해서요.

이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비로소… 서로의 40, 50대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4년 10월 4일
해인 님의 우정의 모양새가 궁금한 구구 드림.



『편지의 단상』은 『밤이 아닌데도 밤이 되는』을 쓴 최리외 작가가 만든 가상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