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료에게 ‘책’이라는 상품을 배송하기
서해인
<작업자의 사전>(유유히, 2024) 출간 후 2개월, 작업자 구구와 서해인이 책을 쓰고, 팔고, 책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다양한 부가 작업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편지의 형식으로 주고 받습니다. 2024년 8월부터 ‘작업자의 홈페이지’에서 비정기적으로 연재 됩니다.
구구 님, 안녕하세요. 서해인 입니다. 우리가 『작업자의 사전』이라는 상품에 대해 처음 이야기를 꺼낸 게 2023년 4월이에요. 그런데 지금이 2024년 8월이라고요? 조금 있으면 우리의 협업 지속 기간이 1년 반을 돌파할 것이라는 점이 못내 놀랍습니다. ‘협업’이라는 게 최초에는 아무리 맑은 머리로 의사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발목을 묶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이따금씩 들기도 하거든요. 나를 묶고 가둔다면 사랑도 묶인 채 미래도 묶인 채 커질 수 없는데, 그동안 어떠셨어요? 거부할 수 없는 저의 마력이 루시퍼 같았나요? 초장부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냐고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개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여하며 모든 감각을 동원하게끔 하는 것이 다름 아닌 협업의 속성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뿐이예요.
처음과 지금 사이를 견주어보면, 오직 둘만이 하던 협업이 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과의 협업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해요. 출판사의 편집자님, 마케터님, 디자이너님, 인쇄소 기장님, 온라인 서점의 MD님들, 동네 책방의 사장님들까지요. 한분한분이 맡은 역할을 다 해주심에, 자신의 전문성으로 독자들에게 가는 길을 시원하게 터주시고 있으심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실은 지금처럼 그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가능한 건 저의 원 앤 온리 협업 파트너인 구구 님이 끝까지 해냈기 때문이에요. 책 출간 소식을 SNS에 알리면서 구구 님이 『작업자의 사전』을 각별하게 여기는 이유로 꼽아주신 “적어도 끝까지 썼고 완성된 버전으로 낼 수 있었으니까 제게는 성취의 경험이 어렵사리 하나 생겨난 셈이거든요.” 라는 말이 증명하는 것처럼요.
7월 말에 땡스북스에서 열렸던 북토크에서 사회를 봐주신 이다혜 작가님이 협업 상대로서의 서로를 향해 칭찬할 판을 깔아주신 적이 있었잖아요. 구구 님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함께 일한 사람들의 기여도를 잘 파악하고 그것에 대해 공적으로 아우르는 샤라웃을 잘 한다’는 걸 저의 장점이라고 공개적으로 꼽아주셨던 것을 기억 합니다. 저는 바로 사고 회로를 돌렸죠. 그런 방식으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내게는 최선의 방어가 아닌가 하고요. 상대방을 고취하고, 협력을 지속하기 위해, 호의적인 피드백을 전해주어야 하는 건 제게 매우 의식적으로, 정확히는 힘을 들여 이루어지곤 하는 일이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일단락 되고 한차례 마무리 타이밍에야 감사의 말을 빌미 삼아 상대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전해주는 것이랄까요? 매 번 잘하면 좋을텐데 저는 그냥 더 늦어지기 전에 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사실, 우리는 ‘책을 좋아했(었)다’는 것을 상호 확인한 이후로 많은 것이 편해졌죠. 구구 님이 저희 집에 몇 번 놀러오신 적이 있잖아요. 첫 방문 때 저의 책장을 보여주는 게 조금 긴장이 되더라고요. 구구 님이 누군가의 책장으로 그 사람을 평가할 정도로 무례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그렇잖아요. 2017년부터 독서 모임을 운영한 사람에게 책장을 보여준다는 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척 긴장되는 일이랍니다. 다행히 ‘신간이 왜 이렇게 많으세요(어제 나온 책을 벌써 사셨어요) (띠지가 아직 둘러져 있는 걸 보니 사기만 하고 펴보지는 않았군요) (그런데 1년 전에 나온 이 구간 친구는 언제부터 이 자리에 누워 있었나요)’ 같은 적독가스러운 멘트를 주고 받는 게 조금 재미있다고 생각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책을 좋아하다보니 책을 만들고 책을 파는 사람들과 긴밀하게 일할 일들이 늘어나게 되었는데요. 그 모든 책 피플들의 이해관계를 조망하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 종종 생각해보고는 한답니다. 제가 맨 처음에 『작업자의 사전』을 상품이라고 쓴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에요. 우리는 이 책을 내기 전에 우리 각자가 속해 온 노동 환경의 일그러진 부분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위해 더이상 다른 역작을 인용하는 대신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사심을 덜어내고서 ‘우리의 독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려해야만 하는 시간을 마주했잖아요. 조직에 속해 있든, 1인 작업자로서의 생활을 이어나가든, 더 많은 ‘동료’가 읽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막다른 골목에 도착했었어요. 우리는 이 책을 상품으로서 판매하기 위해 과연 ‘과거의 우리가 겪었던 것 같은 종류의 역경을 헤쳐나가고 있는 동료’는 누구인지, 또 ‘아무리 바빠도 더 유예하지 말고 지금 자기만의 작업 언어를 재정의 내려야 하는 동료’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떠올려야 했고,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메시지에 대해서도 가늠해봐야 했지요. 이 점에서만큼은 이 책에 관여하고 있는 모두의 생각이 조금씩 달랐고(우리 둘의 생각이 달랐음도 물론이고), 그건 이 책을 마치 저온압착 방식으로 고소한 참기름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짜낸다고 했을 때 각자의 앞에 놓인 키워드가 서로 다른 데에서 드러났다고도 봐요. 제가 보기에 『작업자의 사전』 곁에 놓여야 할 키워드는 ‘계보’ 거든요. 과거를 미화하지 않고, 미래를 낙관하지 않으면서도, 계속되어 온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이 책을 읽은 모두가 우리가 들려드린 온갖 이야기를 다 까먹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일 서사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하려고 애쓰거나 없는 개연성을 부러 찾아서 엮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 그대로 늘어놓고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랐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노동의 계보집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게 제 착각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책을 내기 전에(표지 시안이 나왔을 즈음인 것 같아요), 우리의 잠재적인 동료들을 향해 인스타로 무(엇이든)물(어보세요) 타임을 진행 했는데요. 제 SNS 친구들 중에는 한 때 일에 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다가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읽지 않는다는 답변을 해준 분들이 적지 않았어요. 다양한 사유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 일에 적용이 되지 않을 이야기를 더이상 읽을 필요는 없다는 거였죠. 책 속에 5원칙이 ‘기존쎄’ 스타일로 나열되어 있으면, 상위 두가지 원칙이라도 시도해보고나서 ‘당신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잖아!’ 라며 별점 테러라도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일 이야기들은 이상적인 세계만을 그리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이건 제가 자주 빠지는 함정인데 저는 조직에서 자기 분야에 오래 속해 있던 고연차 저자들의 일에 대한 책을 읽을 때의 감상이 ‘이런 리더를 가지고 싶다’라는 깔대기로 수렴되고는 해요. 이런 리더를 가졌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가정법은 잘 하지 않는 편이에요. 조직을 떠난지 4년이 가까워지고 위계 서열 구조 체계 자체를 이탈했는데도 여전히 ‘나만의 온전한 리더상’을 더듬고 있는 걸 보면, 저는 일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SF로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편지에서는 너무나도 책 얘기를 많이 했는데,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참 많네요. 앞으로 우리가 기약 없이 주고 받을 편지에서도 함께 읽은 책 이야기를 늘어놓게 될텐데, 기대가 큽니다. 다음 편지는 최근 가장 꽂힌 화두에 대해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명탐정 코난 덕질기도 좋고, 휴식하는 법에 대한 것도 좋아요.
아참, 조금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이렇게 촛농이 녹는 건지 내가 녹는 건지 잘 모르겠는 8월에 태어난 건 어떤 기분인가요? 연중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절기인 ‘대설’에 태어난 저로서는 도저히 감도 잡기가 어렵네요. 저는 어떤 할머니가 되어야 겠다는 바람은 없는데요. 한치 앞도 모르겠으니 장기 계획을 세우지 않는 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만, 40대에도 구구 님의 생일 축하를 해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2024년 8월 9일
상상만 하던 편지를 드디어 쓰게 된 해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