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을 보다 명확하게 바라보기 위하여


구구



2022년 여름, 7년여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본격적인 프리랜서의 삶을 시작했다. 조직을 나오니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맘껏 벌일 수 있었고, 그 덕에 일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자니 작업에 속도가 붙고, 더 많은 일들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외부 강연이나 호스트 의뢰도 있었다. 제안을 수락할 때마다 클라이언트가 요청한 프로필을 보내야 했는데 나를 무어라 정의하고 소개해야 할지, 직업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커뮤니티를 이끄는 1인 운영자인 나는 기획부터 디자인, 마케팅, 모임 진행, 행정 업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특정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는 기획자, 마케터, 디자이너, 크리에이터 등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주친 단어가 바로 ‘작업자’다.  

프리랜서나 개인사업자 같은 명칭은 세금 분류를 위해 편의상 엮은 제도 내 단위이자, 하나의 조직에 속하지 않고 감독을 받지 않는 계약상 신분을 의미하는 언어로 상주 근무자도, 아르바이트생도, 계약직도 아니지만 수익이 발생하는 개인이 세금 제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분류한다. 이와 달리 ‘작업자’는 제도가 규정한 ‘일’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용어다. 당장 수익이 발생하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작업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며, 조직에 속해 있더라도 조직 바깥에서 자신의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 역시 사용할 수 있다. 또 다종다양한 업무를 동시에 진행하는 나 같은 사람도 내가 하고 있는 일 중 그 무엇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 작업 과정 전반을 아우르기에 적당한 단어이기도 하다.

나를 ‘작업자’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작업자’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작업과 관련한 단어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스타트업 문화에서 끌어온 단어들, 이를테면 ‘이슈’ ‘리브랜딩’ ‘후킹’ ‘바이럴’과 같은 단어들을 스타트업과 무관한 작업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게 흥미로웠다. 또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나 ‘기절 잠’처럼 작업자들이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일을 대하는 태도에 밈을 접목시켜 사용하는 경우도 자주 눈에 띄었다. 이런 단어들은 업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이 주도적으로 사용해 유행하는 경우가 많고,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작업자를 둘러싼 세계의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듯 보였다.

작업자가 주로 사용하는 용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단어들이 흐리거나 놓치는 문제 역시 많다는 걸 깨달았다. 이 용어들은 작업자의 노동 환경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활용되면서 작업자를 ‘일work’과 ‘노동labor’의 영역 모두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독서 커뮤니티 들불을 운영하고 있는 나와 뉴스레터 〈콘텐츠 로그〉를 발행하고 있는 서해인은 이러한 작업자의 언어 환경에 관한 문제의식을 오랜 시간 나누며, 우리의 생각을 다른 작업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2023년 5월 22일, 『작업자의 사전』의 첫 기획 미팅을 가졌다.

『작업자의 사전』은 각자의 ‘일’의 형태가 제각각인데도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동일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이다. 작업자 듀오 팀 TINN(This is not a novel의 약자.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에 막막함을 느낀 두 작업자의 모임)을 결성한 해인과 나는 작업과 관련한 단어들을 무작위로 문서에 적어 공유하기 시작했다. ‘레퍼런스’ ‘인용’ ‘취향’처럼 우리가 일하면서 자주 떠올리고 사용하는 단어들, ‘핏’ ‘결’ ‘전문성’처럼 무심코 사용하지만 그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단어들을 적었다. 이렇게 모인 단어를 엮어 각자의 정의를 내린 책이 바로 2023년 11월 제15회 언리미티드 에디션(서울아트북페어, 이하 ‘언리밋’)에서 선보인 『작업자의 사전』이다. 이번에 정식 출간하는 『작업자의 사전』은 언리밋 작업물의 확장판으로, 단어 50개와 각자의 에세이를 추가로 더했다. 먼저 1부와 2부에 걸쳐 일하는 ‘과정’과 ‘결과’에 동원되는 말들을, 3부에서는 개별적인 섬으로 존재하는 작업자들의 생태계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관계’의 말들을 살핀다. 끝으로 4부에는 작업자들이 관성적으로 가져다 쓰는 ‘표현’을 모았다. 단어마다 두 사람이 각자의 관점에서 정의한 최신 의미를 나란히 배치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과 관련해 여러 단어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단어들의 뜻과 쓰임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본 적 없는 사람들, ‘일’이라는 세계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조직 안과 밖의 사람들, 작업자들의 단어에 의구심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작업을 하느라 생각해볼 여력이 없었던 사람들, 언어를 정의하고, 해체하고, 재전유하는 과정이 작업자의 노동 환경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을 초석 삼아,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봐도 좋겠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노동’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크고 작은 변화를 불러오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