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 우정에도 번역이 필요하다면
서해인
<작업자의 사전>(유유히, 2024) 출간 후 2개월, 작업자 구구와 서해인이 책을 쓰고, 팔고, 책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다양한 부가 작업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편지의 형식으로 주고 받습니다. 2024년 8월부터 ‘작업자의 홈페이지’에서 비정기적으로 연재 됩니다.
구구 님, 안녕하세요. 서해인 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우정의 계보를 이어갈 방법을 고민해보자는 소중한 제안을 주셨으니,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제가 속해있는 다른 층위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1.
저에게는 네 살 터울의 남동생 K가 있습니다. 그는 경증 발달장애인이고, 얼굴의 절반을 붉은 반점이 덮고 있는 채로 태어났어요. 구구 님도 두어차례 만난 적이 있지요. 제 입장에서 보기에, 동생은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전국민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상황을 사뭇 반가워하는 것 같습니다. 붉은 반점의 일부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죠.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저는 동생과 길을 걸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엄마 저기 좀 봐” 라면서 동생의 얼굴을 신기한 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돌발 상황을 겪습니다. 동생은 저와 함께 할 때나 제가 없을 때나 그런 상황을 셀 수 없이 겪어봤다는 듯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걷는데요. 저는 그 앞에서 가슴을 펴고 당당해지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K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자기 존재 자체로 당당해지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이 관념을 이해하는 맥락과 동일하게 이해할 수 없는 지적 수준을 가졌기 때문이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자주 그의 앞에서 헷갈리기도 합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의존적인 30대 남성이지만, 동시에 확실히 자기만의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 받기 원하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그와의 관계를 동생이 태어난 1992년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배워가고 있습니다. 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즈음, 매 번 보란듯이 새로워지는 거예요. 이 배움은 아마도 제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제가 태권도를 배운 것은 유년기 적 힘 조절이 잘 안되는 그에게 대응하기 위함이었는데(그래서 저는 3단 유단자가 되버렸습니다), 요즘 동생과 저는 아침 저녁으로 포옹을 합니다. 가벼운 포옹이 아니라 힘껏 끌어 안을 때도 적지 않아요. 그런 시간들 속에서 동생이 일방적으로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저에게 어떤 유대감을 주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 한국에서 첫째 딸로 태어난 저는 K-장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자주 앉아있게 됩니다. 첫째 딸인 지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부모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는데, 종종 “남동생은 역시 답이 안 나오는 새끼다” 라고 말해요. 그것은 남동생이 독차지하는 사랑, 우리가 나눠가질 수 없는 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을 모르는 가까운 이를 향해 하는 말이죠. 그러나, K-장녀로서 감당해야 했던 희생이 사실상 거의 없었고, 엄마, 아빠와 1/3씩 나란히 고유한 몫으로 동생과 관계를 맺어오는 데에 바빴던 저는 한국 사회에 흐르는 지배적인 K-장녀 담론에는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겉도는’ 기분을 사람들 앞에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저도 모르게 처음으로 언어화한 것은 2년 전 여름, 『마이너 필링스』의 저자 캐시 박 홍의 북토크에 다녀온 날이었어요. 마침, 아니 지금 생각해도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 북토크에 함께 다녀왔죠. 캐시 박 홍은 이 책에서 아시아인으로서 백인 사회에서 느낀 차별을, 메인 스트림의 상업 예술이 아닌 시를 쓰는 예술인으로서 느끼는 이중적인 차별을 들려줍니다. 어느 모임, 혹은 집단에 형성된 지배적인 문화 때문에 개인이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못하거나 이러한 경험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를 ‘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라 이름 붙였어요. 그 날 저녁 7시 30분에 시작된 북토크를 마치고 자정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조금 남은 밤거리를 느즈막히 걸으면서 저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제 남동생의 누나라는 것, 이렇게 삶을 살아간다는 것, 이게 저의 마이너 필링스인 것 같아요.”
그것은 문화인류학적으로는 K-장녀 서사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여성으로서 내뱉은 고백이기도 했지만, 저만 느끼는 분명한 감정을 남에게 표현하려면 너무 많은 부연 설명이 따라 붙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제가 오래전부터 얕은 괴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거의 아무 것도 나를 외롭게 만들지 않지만, 그런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게 저를 외롭게 했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첫 번째 단행본의 중쇄를 찍지 못한 상태였던 저는 곧 “근데 이런 얘기는 잘 안 팔리겠죠”라는 말을 성급히 덧붙였습니다. 내 안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 쓰고 싶은 이야기가 팔릴만한 이야기인지를 가늠해보는 것은 늘 무의식처럼 동시에 저를 따라다니게 됐어요. 이는 캐시 박 홍 식으로 말하자면 “미적지근한 게 아닌 진정한 재현을 바랐던 마이너리티 독자들”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가능성을 모르는 척하면, 그런 이야기를 쓰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편해지는 것이랄까요. 그러나 그 때의 저는 솔직히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이런 마음을 불쑥 타인에게 전할 수 있다는 걸 좀 신기하게 여겼어요.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생각이 없었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을 내뱉고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구구 님을 어느덧 그만큼 신뢰하게 됐음을 알게 됐어요.
같은 얘기를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작업자의 사전』 첫 번째 북토크가 끝난 어느 6월의 밤, 북토크 참석자의 절반에 달한 분들이 즉흥적으로 함께 하게 된 뒷풀이 자리였어요. 술이 끝도 없이 들어갔고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분이 “작가님들, 차기작은 언제 나오나요~~~” 같은 질문을 가볍게 던지셨죠. 정말 좋았던 건, 우리 둘 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자신이 한 권 분량의 책으로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공유했다는 점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적당한 소재를 가져와 그 순간을 모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건 약자로서의 삶을 사는 동생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남들과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는 동생과 살아가는 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요. 돌이켜보면, 그 용기는 구구 님이 저와 같은 테이블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만으로 안전함을 느끼고 없던 용기가 생기는 것. 그리고 상대도 비슷한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그럴 수 있길 기대하는 것. 저는 그 날, 뒷풀이 자리를 끝까지 지키지도 못한 주제에 막차를 놓쳤고 집에는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귀가했는데요. 잠들기 전에 생각했어요. 이런 게 바로 우정이라고, 의심 없이 쐐기를 박아도 좋겠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것입니다. 저와 K는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매와는 다릅니다. 역시 캐시 박 홍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우리가 “보편성을 갈갈이 찢어버리”면서 만들어나가고 있는 어떤 남매 사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2.
오래 전 일이지만, 전 여자친구는 “네가 내 아빠가 될 수 없으니까 헤어지고 싶어” 라며 저에게 이별을 고했습니다. 그 말은 처음에는 참신하게 들렸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서 차이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러나 그의 말은 그 후로 오랫동안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만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명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종종 연인 사이일 때 그가 늘 결여되어 있다고 느꼈던 감각, 즉 아빠에게서만 전해 받을 수 있는 애정과 늘 당연히 거기 있길 바라기 때문에 새삼스럽도록 시시콜콜한 연결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말은 이런 물음표들과 함께 저를 출구 없는 미궁에 몰아넣었어요. 나는 언제나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영역 안 쪽에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하는가? 그게 상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인가?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이 말하는 ‘아빠 같은 사람’이 어떤 건지 제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사랑을 발명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라고요.
저와 “각자의 계급에 대해, 정체성에 대해 갈급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대화를 나누게 될 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고 하셨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그런 대화를 충분히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이 제게 우정이 부재한 빈껍데기의 비지니스 관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몰랐거든요. 구구 님이 그런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작업자의 사전』에 실린 에세이를 통해 구구 님이 가지고 있는 계급적 고민의 일부를 엿볼 수 있었지만, 그것이 구구 님에게 다른 모든 것들을 제칠정도로 중요하거나 시급한 문제라는 건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요? 이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제가 마주한 것은 구구 님의 말이 아니라 글이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글’이란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 제가 제대로 접한 대상을 뜻합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아무리 행간을 읽어내려 시도해도 구구 님이 더 깊이, 더 본격적으로 나누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에 대해서는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는 겁니다.
한편으로는, 구구 님이 『작업자의 사전』이 출간되는 시점 전후로 계급 문제에 대한 책을 읽기 위해 개최했던 들불의 [머니맨숀]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한 공동 호스트나 참가자 분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 지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은 바를 충분히 나누고 있으리라는 제 멋대로의 짐작도 있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제가 참신한 사유로 차인 후 오래 전에 느꼈던 비참한 기분에 닿아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어. 그런데 내가 그 부분을 충족시켜주지 않아서, 우리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거라고?
3.
오직 저만을 수신인으로 두고 쓰겠다고 하셨지만, 주고받은 편지를 사후에 타인이 발굴해서 엮는 게 아니라 공개된 장소에서 편지를 주고 받겠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임하는 이상 이것은 타인을 고려한 글쓰기가 된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쓰기의 방식이 다른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고 있는 거라고 비춰져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구 님의 말한 바와 같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숨은 참조에 걸어두고 수신인에 명목상 저를 적어두었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을 짚고 싶어요.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구구 님이지만, 저는 구구 님은 물론이고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불특정 다수를 고려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제가 보낸 첫 번째 편지에 대한 구구 님의 답장을 받기까지 두 달이나 걸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당연히 두 번째 편지에 쓰여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비정기적 연재라는 점이 안내 되어 있지만,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사람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에 대해 설명해줄 수 있었을 거예요. 제가 읽고 싶었던 건, 답장 쓰기가 지체될 정도로 바쁘거나, 슬프거나, 아프거나, 혹은 그 무엇도 아닌 것들로 채워져 있었던 구구 님의 지난 두 달 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달리 말할 것도 없이, 제가 구구 님의 답장을 기다렸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저는 종종 구구 님을 기다리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느낍니다. 삶에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 때문에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 그렇게 양해를 돌림노래처럼 구하고 난 날이면 저는 제게 남아 있던 아주 작은 가능성 마저도 비관하게 됩니다. 누구보다도 상황을 이렇게 만든 나를 싫어하게 되는 식이죠. 구구 님은 컨디션 난조이거나, 반려 동물과 급히 병원에 가야 하거나, 다른 프로젝트가 미처 끝나지 않아서, 저에게 정중하게 당일 약속 취소를 종종 청해왔습니다. 그런 일은 지난 몇년간 반복되며 차츰 쌓여갔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갑자기 취소되는 것들에 대해 구구 님이 제게 건네오는 사과를 넘칠 정도로 받아왔어요. 저한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 닥친 일이 부디 순탄하게 해결되길 바란다. 매번 제 쪽에서 발신하는 메시지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구구 님에게 들려오는 사과를 받을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더라고요.
언젠가 구구 님이 고양이들과 아침에 급히 병원에 다녀왔다는 날 제가 이렇게 순전한 질문을 했습니다. “병원부터 구구 님 집까지 캐리어 하나는 제가 들어도 되요?” 제가 생각하기에, 두 명의 고양이를 양 손에 들고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몹시 고될 것 같았거든요. 구구 님은 마음은 고맙지만 제가 미처 몰랐던 고양이들의 습성에 대해 알려주며, 그들의 반려 인간으로서 자신만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때의 저는 제가 넘어갈 수 없는 선을 밟으려 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고양이들의 쾌차를 바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최근에는 R. F. 쿠앙의 장편소설 『옐로페이스』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넷플릭스에 판권을 팔 정도로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 작가 ‘아테나’의 돌연사로, 그러니까 주인공의 죽음이 스포이냐 아니냐를 말할 것도 없이 아주 박력 있게 시작 되는데요. 책 판매부수도, 명성도 고만고만한 그의 동료 작가 ‘주니퍼’가 아테나의 죽음 직후 그의 작업실에 있던 미완성 원고를 충동적으로 훔치게 되는데… 그것은 아직 손 볼 구석이 많지만 베스트셀러 작가의 초고이니만큼 상업적으로 잘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연사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의례적인 경찰의 취조를 받는 주니퍼는 고민 합니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아테나를 나의 친구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가 살아있었을 때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테나의 기쁨은 정말로 나의 기쁨이 되지 않았고 나의 지질함이 아테나와 나눈다고 반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런 우리가 친구일 수 있을까?
“어쨌든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나은 사람과 친구로 지내기는 힘든 일이다. 끊임없이 자신이 누군가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견뎌낼 사람은 없다.” -R. F. 쿠앙 『옐로페이스』(문학사상), p.9
존경까지는 과욕일테지만, 배울점이 있는 친구를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제게는 자연스럽습니다. 이건 잘난 사람만 쏙쏙 골라서 친구 삼는다는 뜻은 아니예요. 바로 이 지점에서, “편집자” 같고 “사수” 같다는 저를 향한 구구 님의 인상평은 난감하게 느껴집니다. 일을 함께 할 때 저는 종종 기다리는 입장에 처했는데, 진행 상황을 묻는 과정에서 그것이 빠른 일 처리를 재촉하는 형태로 드러났을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공동 작업’을 하면서 앞서 언급한 말과 행동들이 자연스레 제게 맡겨진 일이라 간주했습니다. 어떻게든 모든 일들은 우리 각자의 책임감, 잘 하고 싶은 마음, 혹은 그 외의 복합적인 욕망들로 무장한 우리를 일의 최종 골인 지점으로 데려다놓을테지만, 저는 그럴듯한 결과만큼이나 함께 하고 있다는 감각을 유지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중간 과정에서 말이 많아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4.
“우리는 『작업자의 사전』이라는 성공적인 결과물을 함께 만든 동료지만, 우정이라는 결과물을 만드는 데에는 거듭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 앞으로 도착한 편지에서 제게 가장 의외로 다가오는 말입니다. 너와 나의 사이가 내가 생각한 관계의 모양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정도에서 그치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것은 왜 실패라고 정의 되어야만 했을까요? 저라면 상대에게 이 다음을 도모할 의지를 청하면서 ‘관계의 실패’를 선고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매 번의 갈등을 비 온 뒤에는 어차피 땅이 굳어질 것이니, 비가 내리든 말든 맞아야 하는 거라고 쉽게 여기는 건 아닙니다. 다만, 끝장이라는 상대의 말 앞에서 “아니요. 아직 끝장은 아닌데요” 라는 말을 하는 일의 낯뜨거움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네요. 하지만, 차례가 다가왔고 이렇게 답신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지만 친구라고 느꼈던 구구 님에게만 해왔던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기억해두었다가 그의 얼굴이 프린팅 된 옷을 예약판매로 구매해서 선물하는 일
- 독서 모임 기획자인 상대방이 기획한 프로그램의 전체 참가자 nnn명 중 1등으로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일. (이건 저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구구 님이 알려주셔서 알게 된 정보입니다.)
- 집으로 초대해 밥을 해주는 일. (어차피 저는 경기도민이라 불보듯 뻔한 먼 길까지 아는 사람을 초대하는 일 자체가 매우매우 드뭅니다. 그보다는 가급적 상대의 이동 경로를 고려해 적당한 외식 장소를 검색하고 제안하는 편이예요.)
나열 하려니 우습고 유치하지만, 저는 ‘관계의 실패’라는 말을 보면서 이런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드러난, 제가 속한 우정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알고 지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이런 일들을 하지 않거든요.
5.
요즘은 캐시 박 홍의 시집 『몸 번역하기』를 아주 천천히 읽어보고 있습니다. 캐시 박 홍을 좋아하지만 이 책의 완독은 제게 아주 요원하게 느껴지는데요. 이 책을 미리보기로 읽어본 후, 저는 “『몸 번역하기』로 들불에서 북클럽 열어주시면 안 돼요?”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책이든 깊이 이해하고 소화하고 사람들과 꼭 필요한 화두를 나누는 작업자로서 구구 님의 역량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같이 읽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가 주고 받는 대화에서 긴장감이 생길 때마다 일종의 번역이 필요하다는 예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우리에게는 한강 작가님 곁에 있는 데보라 스미스 같은 탁월한 번역가 님은 없는 상황이니, 우리가 서로의 말을 곡해해서 듣지 않도록 번역의 몫을 나눠 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들 '같이 책 한 권까지 썼으면 서로 간도 쓸개도 내어줄 수 있겠지 라고 여기는 두 작업자 사이의 관계'와는 달리, 우리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한 오해를 이제 그만둘 수 있는 방식의 새로운 우정을 만들기 위해서요.
저와 가장 먼 말들로 “외로움, 지루함, 분노”를 꼽아주셨다고 했지요. 저는 오늘의 편지에서 제가 받은 타격감에 대해 인정하며 조금 분노했고(전해졌을까요?),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지루함’으로부터 가장 먼 사람이라는 해석에는 저 역시 동의합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간 또한, 덕분에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2024년 10월 17일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종종 외로움과 분노를 느끼는 해인 드림.